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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창, 김일권의 도루인생
최형석 | 2010-05-23 10:18

90년대 이종범과 전준호가 그랬고, 최근 이대형과 이종욱이 그렇듯이 70~80년대 우리나라 야구에서 도루 혹은 주루스피드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이해창과 김일권.

굳이 이들의 대결을 83년편에 국한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83년 국가대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해창의 입단을 계기로 아마시절에 이어 스피드대결 2막이 시작되었던 이쯤에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상대를 뒤흔드는 현란한 주루플레이 만큼이나 그라운드 밖에서도 평탄치 않았던 야구인생을 살았던 두 선수의 인생 행로입니다.

 

두살이 많았던 이해창은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학창시절 야구를 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고 풍규명씨의 도움을 받아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풍규명씨는 당시 야구협회의 실무자이면서 TV 야구해설을 전담하고 있었고 이후에도 야구계의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던 인물입니다.

이해창은 풍규명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선린상고에서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당시 비슷한 또래였던 풍규명씨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 결국 그의 사위가 됩니다.

(이런저런 사고(?)가 있었지만 그냥 결혼을 했다고 표현하겠습니다.)

 

72년 건국대에 진학했던 이해창은 탁월한 스피드로 국내 최고의 외야수비수이자 국가대표 1번타자감으로 꼽히게 됩니다.

하지만 외야수의 주요항목중 하나인 어깨가 심하게 약했다는 것이 그의 결정적 약점이었습니다.

선린상고 저학년때 포수로도 활약했을 만큼 그도 강견을 갖고 있었지만 방황했던 시절 패싸움을 하면서 각목에 어깨뼈를 상한 이후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건국대 4학년시절 해외원정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구입해온 알루미늄 배트가 야구계에 소개되면서 이듬해인 76년부터 우리나라 야구 공식경기에서 사용하게 된 것.

그리고 4학년 2학기때부터 당시로서는 금지사항이었음에도 실업팀 농협의 유니폼을 입고 실업무대에서 뛰기 시작한 것.

야구계의 실력자였던 풍규명이라는 백그라운드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찌감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실업팀을 선택한 것은 결국 그의 패착이 됩니다.

졸업하던 무렵인 75년말, 우리나라 실업야구에 롯데라는 준프로팀이 창단되면서 그의 동기들인 72학번 우수선수들을 싹쓸이 스카웃했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처럼 계약금이 있었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금융회사 위주의 실업팀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롯데의 동기들을 본 이해창은 이듬해 육군에 입대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군입대를 하면서 일반적인 사례였던 휴직이 아닌 사직을 하게 되고 이는 그의 제대무렵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농협과는 3년전에 사표를 제출하면서 인연이 끝났다고 주장하며 이해창은 끝내 롯데에 새롭게 입단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소속팀의 해체나 인수합병, 혹은 최소한의 동의없이 실업야구선수가 본인의 뜻에 따라 팀을 옮긴 최초의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해창은 롯데소속으로 뛰다가 82년 롯데가 프로팀을 창단하면서 아마야구단을 해체하고, 국가대표 보류선수에 묶여서 프로에 입단하지 못했던 1년동안 야구협회의 주선으로 한국화장품에서 뛰다가 그를 일찌감치 지명한 MBC청룡으로 83년에 입단하게 됩니다.

 

프로에 입단해서도 계속되는 그의 행보는 일단 뒤로하고 이해창보다 더 파란만장한 김일권의 사례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74년 군산상고를 졸업했던 김일권은 역시나 어려웠던 가정환경으로 대학보다는 상업은행이라는 실업팀을 선택합니다.

상은에서 3년을 뛴 김일권은 77년 느닷없이 학업을 계속하고 싶다면서 한양대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지만 1학기를 마친 상태에서 군입대영장이 나오면서 육군에 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군에 입대해도 육군과 공군에 야구팀이 있었고 실업리그에 참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수생활을 계속하는데 큰 지장은 없던 시절입니다.

 

그 무렵 고교시절부터의 포지션인 내야수를 포기하고 외야로 전향했던 김일권은 육군에서 앞서 입대해 있던 이해창을 만나기도 합니다.

당시의 포지션은 이해창이 중견수, 김일권이 좌익수로 이 포지션 배분은 국가대표에서도 거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김일권은 그 무렵 결혼을 하게 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때마침 롯데,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같이 대기업팀들의 창단이 속출하면서 그 역시 다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제대후 포항제철에서 뛰겠다고 주장하던 김일권을 두고 전 소속팀인 상업은행, 그리고 한양대가 크게 반발을 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소속팀의 문제로 1년 가까이 무적상태로 있으면서 80년 세계선수권에 참가, MVP급의 활약을 보이기도 합니다.

81년 규정에 의해 할 수 없이 한양대 1학년으로 다시 복학했던 김일권은 82년 프로가 창설하게되자 또다시 마음이 급해집니다.

이미 국가대표 핵심맴버로 대표팀 보류선수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프로야구 개막과 함께 해태의 캠프로 무단이탈을 한 것입니다.

 

대표팀 무단이탈이라면 영구제명을 받아도 할말없는 중징계감이었지만 당시 호남야구의 정서, 해태의 선수부족, 한양대시절부터 은사였던 김동엽 해태감독의 읍소 등으로 김일권은 징계없이 무사히 해태의 선수로 원년부터 선수생활이 가능했습니다.

 

프로에서의 활약.

김일권은 원년 무난하게 도루왕에 등극한 이후, 이듬해 아마시절부터 도루의 라이벌들이었던 이해창과 김재박의 거센 도전을 받았지만 83년, 84년에도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3년연속 도루왕에 오르게 됩니다.

 

83년에 MBC로 입단했던 이해창은 83년 도루 3위, 84년 도루 2위에 오르지만 팀내 주도권싸움의 결과로 팀의 간판선수였음에도 2년만에 삼성의 이선희와 맞트레이드가 됩니다.

그리고 삼성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2년뒤 태평양으로 재트레이드.

 

이해창은 태평양시절인 87년, 54개의 도루로 첫번째 도루왕이 됩니다.

이 54개의 기록은 프로원년 김일권이 세웠던 시즌최다도루 53개를 넘어서는 신기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공교롭게도 불고기화형사건(뒤에~)을 비롯 김응용감독과 극심한 갈등속에 같은 태평양으로 이적해온 김일권이 89년 무려 64개를 뛰면서 다시 갱신합니다.

도루왕 3연패이후 주춤하던 김일권의 4년만의 도루왕 탈환. 그리고 이듬해까지 다시 2년연속 도루왕.

 

그러는 사이 이해창은 88년을 끝으로 은퇴를 했고 김일권은 도루왕 2연패를 했음에도 LG로 이적했다가 1년뒤에 은퇴를 합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90년대 이종범이나 전준호가 시즌도루 7~80개씩 하면서 역사속으로 묻히게 되지만 이 50도루, 60도루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스피드를 놓고 다투던 두 선수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였습니다.

타이틀을 5번 차지한 김일권이 도루에 좀더 주력했다면 도루왕 1번의 이해창은 공격적인 주루플레이가 돋보이던 선수였습니다.

해외야구가 소개되기 이전 이해창이 만들어낸 루간 주법이 화제가 되면서 곧 일반화되기도 했었습니다.

 

둘중에 누가 더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었을까.

육군팀에서 잠깐, 그리고 국가대표, 은퇴무렵 태평양에서 1년등 적잖이 한팀에서 뛰었던 두 선수라 둘만의 스피드대결도 꽤 있었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과거 국대시절 트레이닝에서 50미터 이내의 짧은 거리는 이해창이, 그 이상의 거리에서는 김일권이 더 빠르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지만 달리기라면 누구에게도 지기싫어했던 두 선수의 자존심상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은 없었습니다.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 풍운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뒤흔들 만큼 재주많은 사람이라는 좋은 사전적의미보다는 재주많큼이나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죠.

 

야구계의 대표적인 풍운아로 불릴 법했던 이해창, 그리고 김일권.

탁월한 스피드에 만만치 않았던 타격재능, 야구센스를 갖추었던 두 선수.

선수시절 만큼이나 은퇴이후의 생활도 남들만큼 평탄하지 않으면서 사회면에도 오르내리던 두 사람은 현재 개인사업을 하면서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있지만 한때는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야구 100년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벚꽃나무 10-05-2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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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선수들을 보지못하는게 큰슬픔입니다.

말로만전해지는 플레이들 역사적인 순간의 홈런

많이 아쉽네요
ShineMore 10-05-24 03:15
답변 삭제  
김일권 선수.
만으로 26세에 데뷔해서 35세에 은퇴, 불과 딱 10년 뛰었는데
그럼에도 아직 통산 도루 5위군요.

실업야구 기록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저리그도 니그로리그 기록은 정리가 안 되어있지만 페더럴리그는 정리가 되어 있고
NBA도 ABA 기록을 거의 다 인정을 해 주더라구요.

일례로 70년대 최고의 수퍼스타 닥터 J, 줄리어스 어빙은
NBA 통산 득점은 18000점 정도 밖에 안 되지만
ABA 에서 쌓은 11000여 점이 엄연히 기록으로 남아 있기에
그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죠.

\"올드스타 누구누구는 비록 프로야구가 늦게 생겨서 기록에 손해를 봤다.\"
이런 얘기는 너무 막연해서 와 닿지 않으니까요..
높새바람 10-05-24 11:25
답변 삭제  
그런데 이 두 선수들은 왜 주루코치로서 활약하지 못했을까요? 나이를 본다면, 최소한 한 팀의 수석코치 정도의 위상은 가졌어야 마땅한 입지인데 말이죠..
대꺼등? 10-05-24 16:10
답변 삭제  
이해창선수...mbc청룡 어린이 회원 출신으로 잊을 수가 없지요...

한가지 안타까운건...

얼마전 뉴스에....조직폭력배에게 위협을 받은 전직 프로야구선수 출신 사업가...

하며 나오는데....이해창 선수더군요....

많이 슬펐습니다..........
최형석 10-05-24 16:26
답변 삭제  
높새바람님글에 대한 대답은 두번째 단락과 마지막 단락의 표현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평탄치않았던 야구인생\'
\'은퇴이후의 생활도 남들만큼 평탄하지 않으면서 사회면에도 오르내리던...\'

김일권은 어느정도 코치생활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두명은 한팀의 코치로 있기에는 사업가적인 보스기질이 너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수 진갑용 10-06-03 20:52
답변 삭제  
이해창 선수는 허슬플레이를 잘 했었죠.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해창 선수가 삼성 시절에 해태와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타자가 유격수 깊은 플라이를 쳤는데 당시 해태 유격수는 서정환 선수였죠. 옆모션으로 잡았는데 그때 3루 주자였던 이해창 선수가 태그업을 해서 홈까지 파고들더군요. 당시 쇼킹했던 장면이었습니다...
소닉 10-06-06 01:06
답변 삭제  
진갑용님...바로 그 플레이는 86년 한국시리즈 2차전 광주경기에서...이해창이 삼성의 결승점을 올려서 2-1 승리하는데 기여한 주루플레이입니다...무려 21년 후 2007년 한국시리즈 1차전 문학경기 SK 대 두산 전에서...두산의 이종욱이 비슷한 플레이를 선보여서 두산이 1차전을 가져가는데 기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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